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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명 상산관
주      소 상주시 만산동 699(임란북천전적지내)
지      정 지방유형문화재 제157호(1982.2.24 지정)
일명 객관(客館)이라고도 하며 조선시대 고을마다 설치되었다. 전패(임금을 상징하는 나무 패, 지방 객사에 전자를 새겨 세워 그 곳 관원이 배례하던 나무 패)를 안치하고 목사가 부임하면 이 고을에 무사히 오래 근무하게 되기를 빌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대궐을 향하여 임금님의 만수무강을 빌고 절을 하는 향궐망배 의식을 행하였고, 나라의 즐거운 일이나 슬픈 일이 있을 때는 모든 관원이 여기에 모여 참배하였다. 한편 사신의 숙소로도 사용하였던 곳이다.

구조는 정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익실을 두고, 앞면에는 중문, 외문, 옆면에는 무랑 등이 부속되어 있으며, 정당은 기와 난 돌을 깔고 좌우 익실은 온돌로 만들었다. 이름하여 상산관(商山館)이라고 했다. 창건 연대는 상산지 2권 객관조에 <본 고을 목사 홍세주가 창립하였고 제도가 크고 중앙에 전패를 모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목선생 안에는 홍세주의 기록이 없는 즉 연대는 고증하기 어려우나 상산지 상권 동조에
<고을 아문 동쪽에 고려 때 김영후가 목사로 와서 다시 고쳐지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1307년(고려 충렬왕 33) 이전이라고 볼 수 있다. 목사 안축(安軸)이 1343년(충혜왕 4) 기문을 지었는데 그 기문이 상산지에 기록되어 있다. 1343년(지정 3. 계미)에 상주의 책임을 맡아 이 해 4월 고을(상주)에 부임하여 보니 근년에 모진 정치에 백성이 흩어지고, 고을에 있는 관사, 학교, 신사, 절 등이 모두 퇴폐 하였으나 오직 객사가 웅장하게 남아 있어 남쪽 지방에서 제일 가는 규모이더라. 생각컨데 이것은 속된 사람이 보통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고 여겨 고을 사람에게 물으니 김영후(목사, 金永煦)가 지었다 하더라. 이 고을은 사면 팔방으로 통하는 요긴한 곳이 되므로 객관이 완성된 뒤에 그 서쪽에 조그마한 집을 지어서 사신이 많이 오고 거처하기에 여유가 있더라.>
위의 기문을 통해 보아 경상도 전 지역에서는 가장 웅장한 건물이었으리라 믿어진다.

1526년(중종 21)화재를 당하였고, 목사 윤탕이 1500년(연산 6)경에 개축하였던 것이 그렇게 되었다. 1592년 임진란 때에 왜군이 모두 불태웠고, 목 선생안의 조계원조에 의하면 <1638년(인조 16) 2월에 도임하여 11월에 객사가 불이나 이듬 해(1639년) 봄에 객사를 왕산 남쪽에(현 경찰서 자리)에 옮겨 세우고 5월에 사퇴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객사를 처음 세운 곳은 확실치 못하다. 상산지에 의하면 목사 이송령(李松齡)이 1666년(현종 7)에 옛 자리에 개축하였다고 하였다. 1907년(고종황제 11)에 객사를 공립 보통학교로 쓰고, 1910년에 현재의 상주여자중학교 자리로 이전하여 상주여자 간이학교로 쓰게 되었다. 군수 김규연이 쓴(1940년) 객관기에 의하면 객관을 1907년에 이를 새로 고치고 소학교로 쓰다가 북정학교(현, 상산 초등학교)를 지어서 나가니 집이 비어서 허물어졌다.

그래서 박인양, 조용연, 박인수, 박정소 네 사람이 읍의 오랜 건물을 없앨 수 없다고 생각하여 많은 돈을 내어 관으로부터 샀다. 이것을 다시 군에 기부하였다. 그래서 옮겨 짓기로 생각하고 기성회를 조직하였다. 조각연이 기성의 책임을 맡아 많은 사람들의 돈으로 보조하여 완공되었다. 옛 모습 그대로 옮거니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 물건이 폐하고 흥하는 것은 깎고 회복하는 이치이고, 사람이 자선하면 사회에 복이 되는 것이다. 앞의 네 사람이 옛 물건을 사랑하는 어진 마음이 없었다면 어찌 이 집이 상산 땅에 옛 모습을 재현할 수 있었겠는가?

1940년에 현 상주여자중학교내로 이건하였다가, 1991년 임란북천전적지인 현재의 자리로 이건하였다.

이 상산관은, 조선시대에는 고을마다 세워 향궐망배의식 및 사신의 숙소로 사용되었으나 자연 이곳은 문회(文會), 시회(詩會)의 공간이 되기도 하였다. 상산관에서 시를 읊은 이로 백운 이규보(1168-1241)는 1196년 2월, 당시 공검지를 수축한 사록 최정빈의 초청으로 상주목사를 비롯한 상산의 선비들과 성대한 주연(시회)을 베풀었다. 상산관에는 정구, 조준, 안성, 김종직, 윤탁연, 황준량, 오상, 이양원 등의 명관(名官)과 향토인으로서는 조원윤, 정상리 등의 시문이 걸려 명실공히 상산(商山) 제일의 시회 공간이 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