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주 이안에 최초로 입향한 성도(聖徒) 서광수(徐光修)
상주시 이안면 양범리 산 18
상주 함창에서 지방도 32호선을 따라 서쪽으로 달리면 함창향교를 지나 이안면 소재지 사거리 교차로를 만난다. 여기서 서쪽으로 조금 더 나아가면 왼쪽에 아담하고도 정겨운 마을을 만난다. 본래 함창군 상서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이안면에 편입되었으며, 산과 산으로 둘러싸인 구릉성 평지에 자리하고, 마을 뒷산의 모양이 조개같이 생겼다고 하여 패릉(貝陵)이라고도 하며, 그 지형이 뱀의 목처럼 생겼다 하여 ‘양배미기’라 불리다가 변하여 ‘양범리’로 되었다. 이 마을이 바로 배모기 교우촌(敎友村) 터이고, 현재는 이안면 양범2리(良凡二里)로 전주 이씨(全州李氏) 집성촌(集成村)이다.
문헌상으로 볼 때 최초로 천주교를 신봉한 사람은 허균(許筠, 1569~1618)이지만, 학문으로서 천주교를 연구하고 신앙으로 실천한 사람은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제자 농은(隴隱) 홍유한(洪儒漢)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후 1784년 이승훈 베드로(李承薰, 1756-1801년)가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서 전교 활동을 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되었다. 실제로 그 이듬해인 1785년 3월 명례방(明禮坊) 앞 역관(譯官) 김범우(金範禹, 토마스 1751-1786)의 집에서 신앙집회가 있을 때, 형조(刑曹)의 순라군(巡邏軍)에게 발각되어, 형조판서(刑曹判書) 김화진(金華鎭, 1728~1803)의 심문(審問)을 받게 되는데, 이 사건이 유명한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다. 이로써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으며, 이때 사대부집 자제들은 훈방 조치하고, 김범우는 체포하여 경남 밀양의 단장(丹場)으로 귀양을 보냈는데, 매 맞은 상처로 인하여 1786년 가을에 옥사하니 첫 순교자이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문중 박해를 피해 서광수(徐光修, 1715~1786)가 다섯째 아들 유도(有道)와 함께 상주 상서면의 배모기로 입향(入鄕), 은거함으로써 상주 북부지방에 천주교 신앙의 씨앗이 뿌려졌다. 그 당시 그의 가문에서는 그와 그의 자녀들이 천주교에 입교하자 문중 회의를 열고, 족보에서 파적(破籍) 시켜 버렸다고 한다. 천주교가 상주 지방에 처음 소개된 것은 아마도 18세기 실학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남인 학자들에 의해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성도(聖徒) 서광수는 용안 현감(龍安縣監)을 지낸 서명함(徐命涵)의 장남으로, 그의 집안은 누대로 내려오는 달성 서씨(達城徐氏, 始祖: 徐晋)로 한양에서 높은 벼슬을 하고 많은 학자를 배출한 명문대가였다. 서광수는 덕수 이씨(德水李氏)와의 사이에 6남(六男: 有弘, 有五, 有萬, 有元, 有道, 有弼)을 두었으며, 1786년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유도(有道)는 이곳에서 몇 년간 살면서 복음을 전파하여 부근의 사실(상주 이안면 대현리) · 은재(문경 가은읍 저음리) · 한실 잣골(문경 마성면 상내리) · 감바우(상주 아천리) 등에 옛 교우 촌이 있었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자 문경 한실로 피난을 갔다.
이안면 양범리 실개천을 앞에 둔 야산 어귀에는 서광수와 5남 서유도 내외의 만년유택(萬年幽宅)이 소재하는바, 묘표 명문(銘文)에는「聖徒 達城徐公諱光修之墓」와「聖徒 達城徐公諱有道 配孺人醴泉林氏之墓」라 새겼고, 이면에는 아들과 손자들을 기록했다. 입구에는 동(銅)으로 조각한 예수님의 대형 십자가상과 야외제대가 있으며, 맨 위에는 「INRI」라 걸었는데, ‘나자렛 사람 예수’를 말함이다. 1996년 묘지 성역화 이후 한때는 많은 사람이 찾아오기도 했지만, 지금은 조금 쓸쓸해 보인다.
당시 서광수의 아들을 살펴보면 장남 유홍(有弘)은 순천으로, 차남 유오(有五)는 청풍으로 갔다가 후에 문경 여우목으로, 삼남 유만(有萬)은 김제로, 사남 유원(有元)은 공주로 흩어져 피하고, 육남 유필(有弼)은 남원 부사가 되었다. 현재 손자 치보(致輔, 2남 유오의 장남)와 증손자 인순(隣淳, 2남 유오의 장손)의 묘소는 문경 여우목 성지(문경시 문경읍 증평리) 내에 있다.
1907년 광문사 문회에서 나라의 빚을 갚고, 국권을 지키기 위해 국채보상운동을 할 것을 발의한 서상돈(徐相焞, 1850~1913)은 현손(3남 서유오의 증손)으로, 대구 본당과 대구 교구 설립 초기에 그 기반을 다지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상주지역은 천주교가 영남지방으로 전래하는 최초의 지역일 뿐 아니라 전 지역으로 확산하게 되는 통로 역할을 한 곳이다. 특히 상주 시내에는 목사(牧使)의 아문(衙門)이 있었기 때문에 신유(辛酉, 1801)·을해(乙亥, 1815)·정해(丁亥, 1827)·기해(己亥, 1839)·경신(庚申, 1860)·병인(丙寅, 1866)박해 등 역대 박해 때마다 문경, 상주 등지에서 체포되어 온 신자들이 관아에서 영장에게 문초를 받다가 사망하거나 감옥에서 옥사하거나 형장에서 참수를 당하여, 이 지방에 살던 많은 신자가 순교하였다.
이처럼 현재 천주교와 관련한 사적지는 서광수 부자 묘소와 상주 시내 옥 터(성동동)와 형장(刑場, 옥 터 바로 옆 옛 소전골과 상주소방서와 서문동 성당 부근), 계산동 천주교 공동묘지, 청리 서산(西山)의 화형(火刑) 터, 삼괴리 신앙 고백비(信仰告白碑) 등과 퇴강성당(지방문화재자료 제520호)이 있는데, 이들은 역사성과 물증이 충분하기에 조화롭게 잘 연결하면 훌륭한 성지(聖地)로 탈바꿈되어 많은 사람으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받지 않을까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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