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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8-01 08:52
우국충정(憂國衷情)의 선비, 김각(金覺)선생-김광희[문화관광해설사]
 글쓴이 : 상주문화원
조회 : 6,387  
우국충정(憂國衷情)의 선비, 김각(金覺)선생

 진정한 상주 선비 정신을 실천한 김각(金覺, 1536~1610) 선생의 자(字)는 경성(景惺)이고, 호(號)는 석천(石川)이며, 관향(貫鄕)은 영산(永山, 始祖: 金令貽)이다.
일찍이 어려서부터 부친(芸亭, 金彦健)의 가르침을 받아서 절의 사상(節義思想)과 효우 사상(孝友思想)에 깊이 빠져 들었다. 특히 부친을 닮아서 효성이 특출하였으며, 시부(詩賦)에도 능하였다. 이리하여 배운 바를 몸소 익히고, 일을 당하여서는 처단함이 명쾌하여 아버지조차도 “통솔할 재능이 있다.”라고 하였다.

상산지에는「金覺 彦健之子風槩豪爽器識出人壬辰倡義有功巡察使聞于 朝授禮賓寺正後二子知復勳 贈左承旨(新)號石川享淵嶽書院(언건의 자이다. 풍채가 호상 하며, 기지가 범인에서 뛰어났다. 임란 때 창의 유공 하여 순찰사가 조정에 報하니, 예빈 시정이 제수되었고, 뒤에 아들 지복의 공훈으로 좌승지가 증직 되었다. 호는 석천이고, 연악서원에 봉향하였다)」라고 적었고,
조선왕조실록(선조실록 72권, 선조 29년(1596) 2월 9일)의
‘비변사에서 토잔에 험조·죽령에 토성이나 목책·공주에 포루 등의 설치를 건의하다.’에서는
「……尙州居主簿金覺, 亂初起兵, 以軍功出六品, 可以團束本處之人, 以爲屯田設險之計。 臣等之意, 李祉遞差, 以金覺代之, 專責此事爲當。……(상주에 사는 주부 김각은 난이 일어난 처음에 기병하여 군공으로 6품에 오른 사람이니, 이곳 사람들을 단속하여 둔전을 만들고 험조를 설치할 계책이 있을 것으로 봅니다. 신들의 생각에는, 이지를 체차 하고 김각으로 대신하여 이 일을 전담시키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라 적었고,
선조실록 182권(선조 37년(1604) 12월 26일)에서는 「……金覺爲穩城判官……(김각을 온성 판관으로)」와 선조실록 186권(선조 38년(1605) 4월 8일)의
‘김종득이 북변 오랑캐의 상황을 아뢰고 군비 및 군사의 증강을 아뢰다.’에서는
「……咸鏡北道兵使金宗得啓: "穩城府則以判官金覺定將臣, 來住行營; 使虞候成佑吉, 率領軍馬, 往來鐘、穩之間, 兼察潼關守護等事, 以壯江邊聲勢……(함경북도 병사 김종득이 아뢰었다. "온성부는 판관 김각을 장신으로 정하여 행영에 내왕하게 하고, 우후 성우길로는 군마를 거느리고 종성과 온성의 사이를 왕래하면서 겸하여 동관을 수호하는 등 일을 살펴 강변의 성세를 강성하게 하였습니다.)」라 적고 있다.

석천(石川) 선생은 1566년에 노기(盧麒)ㆍ김성ㆍ송량(宋亮)선생 등과 낙사계를 조직하여 향풍쇄신에 동참하였고, 이듬해인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선생이 35세 되던 해에 부친상을 당한 뒤로는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낙동강변에서 낚시로 소일하였다.

향리에서 월간(月澗) 이전(李㙉)과 창석(蒼石) 이준(李埈), 월담(月潭) 김정룡(金廷龍) 등 훌륭한 인재를 길러낸 교육자이고, 높은 학식을 가진 학자였으며,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실천한 선비로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습니다.

그리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5월 안령(鞍嶺)에서 이전(李㙉)ㆍ이준(李埈)ㆍ정경세(鄭經世)ㆍ송량(宋亮) 선생과 선생의 아들 지복(知復) 등 10여 명의 사족들이 중심이 되어 의병을 일으켰고, 6월에는 동지들이 1,400명으로 늘어나자, 경상도 순찰사가 직접 상의군(尙儀軍)이라 이름 하였고, 9월에는 선생이 상의군(尙儀軍)의 대장(大將)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이에 사기가 충천한 상의군(尙儀軍)은 안령(鞍嶺) 등 촌락에 출몰하는 왜병 수백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는데, 이때 선생의 나이는 58세였었다.
그러나 사기가 충천한 상의군(尙儀軍)이 잠시 방심한 것을 틈타서 왜병이 급습하는 바람에 안령전(鞍嶺戰)에서 많은 손실을 입었는데, 이때 복재(復齋) 정국성(鄭國成)· 정명세(鄭鳴世) 선생, 창석(蒼石) 선생의 부모님 그리고 상산인(商山人) 서재(西齋) 김신(金紳)과 아들 유성, 유명, 유휘, 유진 등 5 부자가 희생되는 등 큰 화(禍)를 당했다.
총 70여 회의 싸움을 통해 선생은 상의군의 의병대장으로서 막강한 역할과 큰 전과를 올렸지만, 모든 전공(戰功)을 소모관(召募官) 이준 선생과 판관(判官) 정기룡 장군을 비롯한 휘하 장병들의 공으로 돌리고 본인은 상직(賞職)을 사양하여 만인의 존경을 받았는데, 이처럼 선생은 사양지심(辭讓之心)을 실천한 선비였습니다.

아버지의 상(喪)을 당해서는 너무 슬퍼하여 몸이 야윈 것이 제도를 지나쳤다고 했는데, 계사년(癸巳年) 봄에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서도, 쇠로(衰邁)한 나이에 전쟁으로 인하여 핍박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상례(喪禮)를 집행함에 흔들림이 없으니, 사람들이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그리고 나라가 위급할 때는 목숨을 내걸고 싸운 우국지사(憂國之士)였으며, 70 노경에도 존애원(存愛院)을 창립하고, 도남서원(道南書院)을 세우는데 앞장을 서 오신 분이다. 1726년(영조 2)에 연악서원(淵嶽書院)에 선생을 봉향(奉享)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고, 상주가 충절 향(忠節鄕)임을 나타내는데, 일익을 담당한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행한 상주의 큰 선비이시다. 선생의「제석천대(題石川臺)」,「제낙고초당(題洛皐草堂)」의 시(詩)와 석천집(石川集)이 전한다.

공의 휘(諱)는 각(覺)이고, 고조(高祖)는 형조 좌랑(刑曹佐郞) 민(旼)이고, 증조(曾祖)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공저(公著)이다. 배위(配位)는 상산 김씨(商山金氏)로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 충(冲)의 딸이다. 4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동부 참봉(東部參奉) 지백(知白)이고, 다음은 선공 첨정(繕工僉正) 지절(知節)이며, 다음은 지덕(知德), 다음은 지복(知復)이다. 딸은 강진립(康震立)에게 출가하였다.
상주시 내서면 추산(錘山) 자락 언덕에 큰 덤이 둘 있으니 바로 선생과 아들의 유택이다. 창석 이준이 스승의 묘갈명(墓碣銘)을 지었으며, 묘비(墓碑)의 명문(銘文)은「奉正大夫守軍資監正永山金公之墓 令人商山金氏 祔」라고 음각(陰刻)하였으며, 그 아래에는 아들 우연(愚淵) 지복(知復)의 묘소인데, 재각(齋閣)이 하나쯤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