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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7-26 13:47
상주 상산관(商山館) 용두(龍頭) - 김광희[문화관광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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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상주문화원
 조회 : 5,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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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상산관(商山館) 용두(龍頭)
지방 유형문화재 제157호(1982.2.24)
소재지: 상주시 경상대로 3123
상주의 성지(聖地) 임란북천전적지에 고풍스럽고 위풍당당한 큰 규모의 옛 건물이 턱 하니 서 있으니, 이곳이 바로 상주가 자랑하는 영남 제1의 객사(客舍)인 상산관(商山館)이다. 상주는 사벌국(沙伐國) 이래로 사통팔달의 요지 웅주(雄州)로서 영남(嶺南)의 으뜸 고을이었다. 서기 1018년에 설치된 상주목(尙州牧)은 바로 고려 8목 중 한 곳이다. 그 으뜸 고을의 객사(客舍)가 바로 상산관이니 영남 제1의 객사로 통(通)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상산(商山)은 상주의 별호(別號)로, 990년 고려 성종 때 상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이를 보면 상산이라는 이름도 천년(千年)을 넘게 이어왔다. 그래서 상산관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상산관은 읍치(邑治)를 구성하는 주요 시설 중의 하나인 객사로 고을의 기능적, 상징적 중심의 역할을 수행해 온 곳이다. 따라서 상주시는 올해 상주목(尙州牧) 천년 기념(千年紀念) 조각공원을 조성한다.
객사는 공적(公的) 공간으로 옛날 외국 사신이나 전령들의 숙소였고, 때론 선비들의 연회(宴會)나 시회(詩會)의 공간이었다. 또한, 객사는 조선시대에 전패(殿牌)를 안치(安置)해 삭망(朔望)에 지역의 고을 책임자가 임금을 향해 절을 올리는 신성한 곳이기도 했다. 상산관의 정청(正廳) 안에는 옛날 향 궐망배(向闕望拜)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再現)돼 있다. 당시 각 고을의 객사 명칭을 보면 울산의 학성관(鶴城館), 청송의 운봉관(雲鳳館), 고양의 벽제관(碧蹄館), 경주의 동경관(東京館), 밀양의 밀주관(密州館), 성주의 성주관(星州館), 남원의 용성관(龍城館)…… 등으로 그 지역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현재 상산관은 번와(翻瓦) 작업 중이다.
상산관은 잘 다듬어진 돌로 쌓은 네 층의 기단 위에 중앙에 정청(正廳)은 정면 3칸, 측면 4칸으로 좌우(左右) 익헌(翼軒) 보다 지붕이 한 단계 더 높으며,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동(東) 익헌은 정면 7칸, 측면 3칸이고, 서(西) 익헌은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동 익헌이 가장 크다. 정청과 양 익헌 사이에 각 1칸이 있어, 정면에서 보면 모두 16칸으로 아주 장엄(莊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정청에 맞닿은 반대편은 양 익헌 모두 팔작지붕이다. 정청의 기둥은 상부가 이익공(二翼工)이고, 7량가(樑架)로 대들보와 중보 위에 동자주(童子柱) 익공과 행공을 끼우고, 주두를 얹어 종보를 받게 하였다. 양 익헌은 초익공(初翼工)이다. 건물의 외부는 원기둥이고, 안에는 각주(角柱)로서 연목(椽木)천장을 하였고, 겹처마로 멋과 장식을 더 했다. 현판은 정청 가운데에「상산관(商山館)」으로 걸었다. 지붕마루(용·내림·추녀) 끝에는 해학적(諧謔的)인 용두상(龍頭像) 16기(정청6, 동익헌5, 서익헌5)를 얹어, 상주 상산관의 위상(位相)을 높여 주고 있다.
전국적으로 객사에 용두를 얹은 곳은 평택의 팽성읍 객사(彭城邑 客舍, 유형문화재 제137호)의 정당 용마루에 용두 2기가 있으며, 전주 객사(全州客舍, 보물 제583호)는 신주를 모셔두는 감실(龕室)앞에는 홍살문을 세웠으며, 정청에는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는 현판을 걸었는데, 이는 전주객사를 일컫는 말로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원지라는 뜻이라 하고, 정청 용마루 좌우에만 용두(龍頭)가 있다. 많은 객사가 있지만, 이 용두상은 쉽게 볼 수 없는 아주 특이한 것이다.
장식(裝飾)으로 고대 건물 용마루 양 끝에는 치미(鴟尾)와 치두(鴟頭)가 있고, 내림마루에는 용두(龍頭), 귀(추녀)마루에는 잡상(雜像)을 올린다.
이러한 형상들을 보면 치미는 솔개의 꼬리모양이고, 용두는 용의 머리를, 취두는 독수리 머리 모양이다. 삼국시대에 주로 사용한 치미는 고대건물의 용마루 좌우 끝에 얹어 장식하는 것으로, 입을 크게 벌려 용마루를 물고, 용 꼬리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으며, 고려 시대에도 있었으나 조선 시대에는 점차 취두로 바뀐다.
취두는 용의 형상과 같이 조각되었고, 궁전 건물에만 사용한다고 한다. 용두는 용· 내림 마루에 올려놓은 용머리 형의 장식용 기와로 궁전건물, 왕릉의 정자각, 침전, 문묘, 행궁, 지방관아 등에만 사용되었고, 일반 민가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다만, 왕릉 인근의 원찰(願刹)의 법당에는 사용된 예(例)가 있다.
치미, 취두, 용두 형상은 모두 상징적(象徵的)인 의미와 주술적(呪術的)인 의미(재앙과 악귀, 화재 방지)가 있다. 상징적으로는 하늘과 가장 가까운 지붕 위에, 날 짐승의 우두머리인 독수리와 솔개를 올려놓음으로 왕권을 상징하고, 사찰 법당에서는 최고의 권위와 위엄을 나타낸다.
잡상은 건축물의 추녀마루에 장식, 배열하는 작은 짐승 형상으로, 최고 11개로 소설 서유기(西遊記)에 등장하는 인물과 토지 신(神)을 형상화한 것으로, 현장법사(玄奘法師), 손오공(孫悟空), 저팔계(豬八戒), 사오정(沙悟淨) 등으로 앉거나 엎드리거나 혹은, 뒤로 젖혀 앉아서 집안으로 들어오는 잡귀를 막는 구실을 한다.
이 잡상은 전각(殿閣)의 등급(等級)에 따라 배열(配列)되는 수나 크기에 달라지는 원칙이 있어, 중국에서는 황제궁(皇帝宮)에 11개, 세자궁(世子宮)에 9개 등 지위(地位)에 따라 숫자가 정해지고, 잡상의 수(數)는 항상 홀수이다. 현재 근정전 7개, 숭례문 9개, 경복궁·경회루는 11개이다. 옛날 상주 읍성의 남문은 5개가 얹혀 있었다.
상산관은 시인 묵객이 솜씨를 뽐내던 곳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가사체 문학의 효시(嚆矢)인 서하(西河) 임춘(林椿)이 고려 명종 때(1175년 전후) 상산관에서 관리들과 시(詩)를 주고받았으며, 백운(白雲) 이규보(李奎報)도 상산관을 찾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정구, 조준, 안성, 김종직, 윤탁연, 황준량, 오상, 이양원 등의 명관과 향토인으로 조원윤, 정상리 등이 시문(詩文)을 남겼으니, 어찌보면 상주 시문학의 수준이 당대 전국 최고였지 않았을까.
그 옛날 객사는 숙소(宿所)라는 기능을 넘어 시와 노래가 있었고, 성스러운 곳 이었다. 따라서 상주인은 상산관을 쉽게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용두를 16기나 얹은 연유와 배경을 생각하면서, 이제 시(詩)와 음악(音樂), 신성함을 가슴에 안고 상산관을 새롭게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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